성경을 푸는 원리
성경을 푸는 원리가 있습니다. 갈매기도 조개를 먹을때는 그냥은 조개가 입을 다물고 있기에 그냥은 먹을 수 없다고 하잖아요. 조개를 물고서 하늘 높이 올라갔다가 딱 바위를 겨냥해서 떨어뜨리면 바위에 딱 하고 떨어지는 순간, 아야 하고 입을 쫙 벌릴 때, 그때 가서 뽑아 먹는다고 그러잖아요
수박도 먹는 법이 있어요.
"수박은 맛있다. 맛있다. 이렇게 믿어라."하고 무조건 먹어봐라 해서, 수박이 맛있는 게 아니잖아요. 수박은 그냥 무조건 믿어라. 맛있다. 믿어라. 이것이 아니라, 수박을 먹는 법을 가르쳐주면, 수박이 맛있는지 아닌지, 자기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는 거예요.
수박은 그냥 딱 잘라가지고, 안에 알맹이를 딱 먹여주면,
"어때?"
"맛있네요."
"그래. 맛있는 거야. 어때?"
"맛 없는데요."
"그렇구나. 사람마다 다 입맛이 다양하니까 뭐. 너 그럴 수도 있지. 너는 맛 없나 보다. 나는 맛있는데."
그럼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가지고 그냥
"무조건 먹어봐라. 무조건 먹으면 맛있다."
그런데, 맛 없으니까.
"니가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다. 니가 예배를 안 나와서 그렇다. 니가 죄가 있어서 그렇다."
그거 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이 사람은 수박을 먹을 줄 몰라가지고, 수박을 사과먹듯이, 껍데기부터 막 먹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것을 잘라서 안에 알맹이를 빼서 먹어야 한다는 걸 모른다는 거죠.
우리가 귤을 먹는데, 또 오렌지를 먹는데, 그걸 갖다가 까서 먹는 줄 모르고, 그냥 껍데기부터 먹으면 맛이 없죠. 그런데 그것은 먹는 법을 가르쳐주면 되잖아요. 이와 같이 먹는 법이 있다는 거죠.
그런데, 2000년 신약 역사에 있어서 성경을 푸는 법은 뭐냐 하면, 축자 영감설. 각 글자마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이것을 함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조사 하나도 바꿔서는 안 된다. 축자 영감설을 주장하고 있고.
그리고, 성서무오류설. 성서는 오류가 없다. 성경은 오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조건 믿어야 된다. 못 믿을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믿을 거 믿고, 못 믿을 거 못 믿으면, 그게 무슨 믿음이냐? 못 믿을
거 믿는 게 믿음이지."
이런 논리로 성경을 풀어간다는 거죠.
그래서
"이게 이해 안 돼요."
"니 인간의 생각으로는 그 이해가 안 돼. 우리 인간은 타락됐잖아. 그래서 때가 묻었잖아. 그리고 우리 인간은 너무 미비하고, 멍청하고, 미련하잖아. 하나님 앞에. 그러니까 네가 이해를 못하는게 당연해. 무조건 믿어." 그렇게 간다는 거예요.
신약 역사의 토대를 만든 성 어거스틴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성 어거스틴이라는 이 사람이 신약의 기초를 다진 사람인데, 이 사람이 삼위일체에 대해서, 너무 머리가 아파가지고, 이거 도대체 도대체 해결할 수가 없고, 이걸 어떻게 풀어낼 수가 없는 거예요.
'어떻게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이면서도 따로고, 따로면서 하나이고. 이게 도대체 뭐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하고 고민 고민하고 이걸 풀 수 없어, 너무너무 괴로울 때, 그가 깊은 기도 속에 환상을 보았는데 넓은 바다에 자기가 서 있는 거예요. 바닷가에.
근데 그 넓은 바닷가에 어떤 천사가 와가지고, 이런 어떤 물병에다가 바닷물을 퍼서 담는 거예요. 바닷물을 퍼서 담고, 계속 퍼서 담는데, 바닷물은 전혀 줄어들지가 않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아무리 푸고 푸고 퍼 담아도 이 바닷물이 없어지지 않더라는 거예요. 그때 자기가 깨달음을 확 받습니다.
"그렇구나! 이런 어떤 삼위의 세계, 삼위일체. 이 세계에 대해서는 인간의 생각으로는 함부로 도대체가 해석할 수 없는 아무리 아무리 푸고 푸고 물을 퍼담아도 퍼담아도 퍼담아도 그 바닷물을 다 담을 수 없는 것처럼, 이것은 인간의 지식과 지혜로는 한계가 있는 것이니,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하고 자유로움을 얻었다는 거예요. 그러니 이런 식이죠
이와 같이, 사람의 지능으로는 도대체가 다 해석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무조건 믿자. 믿으면 된다. 이것이 성경을 푸는 원리였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랑의 하나님인데, 그냥 안 믿는 사람도 다 불에 타서 태워 죽여버리고, 그리고 우리는 사실 이 땅이 좋은데, 굳이 오셔가지고
"야 이 땅에 살지 마. 이 땅 없애버릴께."
"이 땅 없애면, 우리가 어떻게 해요?"
"저 하늘나라 저 구름위에다가 내가 새하늘과 새땅 딱 만들어서 거기서 살자."
"나는 이 땅이 좋은데. 이 땅에 축구도 하고, 이 땅에서 좀 뛰고 다니고. 이 땅에서 그냥 산에 등산하고, 이 땅에서 바다 수영도 하고 좋은데. 아이고 저 새하늘과 새 땅에 무슨 구름위에 무슨 바다가 있어요? 뭐가 있어요? 산이 있어요. 뭐가 있어요? 하나님. 여기 좋은데."
"그런 생각 하지 마. 그건 너 인간의 생각이니까. 그냥 인간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그 큰 생각을 다 이해할 수 없어 없어. 무조건 믿어. 못 믿을거 믿는 게 믿음이야."
그리고 "이게 말이 됩니까?" 하면.
"그건 니 생각이고. 하나님 생각은 달라. 니가 하나님 생각을 모르잖아."
이렇게 다 무조건 믿어버리라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 기성의 성경을 푸는 원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이미 배운 것을 다시 돌아보면, 성경은 시대성을 고려해서 봐야 된다. 성경을 푸는 원리 중에 하나가 시대성을 고려해야 된다.
성경은 하나님이 쓰신 책이지만, 사람을 통해서 쓰신 책이고, 그 사람에게 전하라고 한 책이기 때문에, 그 시대성의 옷을 입고 있고 있기 때문에, 그 시대성의 옷을 벗겨봐야된다. 고려해야 된다. 이것이 시대성을 보라 하는 것이 성경의 원리죠
성경을 보는 방법 (시대성)
그러다 보니까, 우리도 그 시대상을 고려하지 않으면, 정말 착각하는 경우가 참 많죠.
자녀를 낳으면, 정말 하와 같은 자녀를 낳게 해달라고 그러고. 아들을 낳으면 아담 같은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했더니만, 아들이 태어났는데 완전히 진짜 원숭이 같은 애가 하나 태어난 거예요. 그래서 이게 어찌된 일이냐?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고 보니까. 정말 아담과 하와가 그림에 나오는 것처럼, 멋있고 그냥 몸매가 쫙 잘 빠지는 어떤 그런 모습으로만 우리는 고정관념에 빠져 있는 거예요 사실은.
그런데 냉철하게 생각해 보면, 6천 년 전의 사람이에요. 6000년전 사람은 거의 준 원시인이란 말이죠. 그 준원시인인 사람이 무슨 몸매가 그렇게 잘 빠졌겠으며, 피부가 하얗겠으며, 그렇게 멋있게 그냥 갖춘 그런 아름다운 미모가 있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냥 원시인이니까. 그냥 원숭이하고 인간 중간쯤에. 그 정도 얼굴. 그 정도 얼굴쯤 되면, 아주 그냥 예쁘다고 아주 잘생겼다고 할 그런 시절이라는 거예요. 그걸 모르고, 그냥 아담은 그냥 멋있을 거다. 그 어떤 그림에 나와 있는 것처럼 그렇게 멋있지 않을까? 근육질에 그냥 잘 빠진 몸매. 그게 아니라는 거죠. 시대성을 고려해야 된다.
성경을 보는 방법 (비유)
두 번째는 성경은 비유로 되어 있다. 많은 부분이 비유로 되어 있다. 그래서,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된다. 그 비유의 원리는 그 비유의 해당체가 성경에 있어야 되고, 또 실제로 그러해야 된다. 이것으로 인해서 그게 비유가 맞는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다고 그랬습니다
성경을 보는 방법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는가)
그리고, 세 번째는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존재하고 있더라. 구약은 뭐냐하면 옛 약속. 신약은 새로운 약속이죠. 뭐에 대한 약속일까? 메시아 강림에 대한 약속. 메시아에 대한 약속이죠. 구원에 대한 약속이죠.
그런데, 원래부터 약속이 아니라, 원래부터 옛 약속이 아니라, 새로운 약속이 생기다 보니까, 그전의 약속은 옛 약속으로 구분하기 위해서, 옛 약속으로 바꿔버린 거죠.
우리나라도 보면 고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잖아요. 원래 고조선의 나라가 고조선이 아니에요. 그냥 조선이에요. 조선인데, 뒤에 가다 보니까 또 조선이 하나 더 생긴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이 조선과 옛 조선을 구분하기 위해서, 그 옛 우리 원조 조선을 고조선 이렇게 만들어버린 거예요. 이름을 그렇게 붙여버린 거죠.
그래서, 이 신약 구약이라는 개념도 옛 약속이라는 것은 원래 그의 약속이었어요. 그런데 새로운 약속이 생기니까, 옛 약속이라고 했고, 동일한 약속! 그러면 그 동일한 약속에 대한 어떤 내용도 동일할 거라는 거죠.
그래서, 구약의 예언은 신약 때, 예수님 때 성취가 되잖아요. 예수님의 성취가 되고, 그 다음에 신약의 예언은 새로운 약속이니까. 이 약속도 또한 구원에 대한 약속인 거에요. 동일한 구원에 대한 약속. 다만 차원이 다르다는 거죠. 그런데, 그러다 보니까, 이 신약에 대한 약속은 재림주가 오실 때에 일어나는 성취될 일인데, 이것은 지금 우리가 아직까지 모른다는 거죠. 이거는 미지수다.
그러니까, 옛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는가를 보면 새로운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는지 가늠할 수 있다. 이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목적이 바로 이 이유라는 거죠.
역사는 그냥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요거 달달달 외우세요." 이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1592년에 일어나면 어떻고, 1600년에 일어나면 어떻고, 1700년 일어났으면 뭔 상관이 있냐는 거예요.
이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목적이 아니고. 어떤 달달달 지식을 외우는 게 목적이 아니라, 역사를 공부하는 목적은, 지금 현재 상황을 가만히 보니까,
"어 지금 심상치 않네 이렇게 가다가는 우리가 큰 위험에 빠지지 않을까? 그럼 어떻게 대처해야 되지?"
"아니 무슨 위험? 위험 없어요."
"아니요 위험이 있어요."
위험이 있으면, 또 어떻게 대처해야 될까? 이런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가능성을 열어놓고. 그러면은, 이때 과거의 상황을 가만히 보니까, 지금 우리 시대와 똑같은 비슷한 사례들이 있었네요? 라는 거죠.
그 사례가 뭐냐면, 예전에 임진왜란 일어나기 전에 이런 상황이었었어요. 그때 만약에 우리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이렇게 대처했더라면, 이런 결과가 나왔지 않았을까요? 이렇게 대처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상황을 볼 때, 그때를 고려해 볼 때, 이때를 고려해 볼 때, 그때가 a였는데 그것이 b가 되었다고 한다면, 지금이 거의 비슷한 a'인데요 그럼 지금 뭐가 될까요? b'가 되겠지.
이렇게 역사라는 것은 과거 학문이 아니라, 과거의 어떤 사례를 바탕으로 해서,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미래 학문이라는 것이죠. 첨단 학문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도 이와 같이 이 신약에서 여러 가지
"어떻게 하나님께 우리 잘 살고 있는데 오셔서 이 지구를 박살 내버리고 그냥 작살내버릴까? 그리고, 45억년 동안 이렇게 준비했다가 고작 6천 년 겨우 살게 해놓고. 하나님 역사 펴놓고 이렇게 박살 내버려? 왜 그러시지. 굳이? 그럼 왜 이렇게 공들였어? 만들지를 말지. 또 만들었으면 아담때 작살 내버리지. 노아 때 박살 내버리지. 예수님 십자가 다 박살 내버리지. 왜 가만히 있다 지금와서 왜 그러셔? 도대체?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인데 그렇게까지 모질게 그냥 불로 다 태워서 그렇게 죽이고. 짐승도 동물들까지 만물들까지. 그렇게 하실 필요가 있어? 또 땅은 영원히 있다고 했는데, 그런데 왜 땅이 그렇게 없어져야 되지? 소멸돼야 되지?"
이런 데에 대한 많은 의문들,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다는 거죠. 확신할 수는 없다는 거죠. 생각은 할 수 있지만.
그래서, 과거의 상황을 한번 보자. 그리고 과거의 상황 보니까 구약에는 어떤 예언이 나와 있을까? 구약에는 그 구약의 끝날에 대해서 메시아가 오면,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되어 있을까? 하고 보니까,
불심판
구약 말라기 4장 1절에서 2절 보면, 그날에도 역시 마찬가지로 불심판한다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냥 교만하고 악을 행하는 자가 초개와 같이 숯덩이처럼 만들어버린 경우, 세상을 완전히 불바다 만들겠다. 그렇게 되어 있고.
이사야서 66장 15절에도 보니까, 하나님께서 불과 칼의 옹이 되어 강림하시리라.
한쪽에는 불, 한쪽에는 칼을 들고 막 오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불로 막 세상을 확 휩 불질러버리고.
불과 칼이 옹위 되어 강림한다고. 이사야서는 메시아 강림 예언서란 말이에요. 메시아가 강림하면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 이런 것을 많이 기록해 놓았던 것이 이사야서거든요. 그런데 이런데서 이런 핵심적인 구절 나와 있고.
또, 요일서 2장 3절, 3장 1절, 그 다음에 3장 15절 이런데도 이 천재 지변. 아까 말한 해와 달과 별이 떨어지고 하늘이 종이축처럼 말리고, 어떤 천재지변 우주 지변이 일어난다 이런 것들이 많이 나와 있죠.
이와 같이, 이렇게 구약에도 이런 내용들이 신약처럼 많이 나와 있습니다. 신약 베드로서 3장 10절에서 13절, 데살로니가 후서 1장 7절에서 8절. 이와 같이 이 세상을 초개 같이 숯덩이처럼 불바다를 만들어버리고, 모든 생명들을 다 불태워서 이 지구를 종말시킨다 그렇게 나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이 일어날 것인가 했을 때, 과거의 상황들, 신약때를 한번 보자.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셨는데, 예수님때는 구약의 심판에 대한 예언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보자구요.
예수님때, 구약의 유대인들 소망이 너무너무 간절했어요. 유대 땅은 항상 역대로 그 서아시아를 지배했던 초강대국들이 항상 이 매스포타미아에 있던 그 유대 땅을 지배하고 있었거든요. 한 번도 힘도 한 번 못 써보고 계속 대제국 앞에 상대도 못할 대제국 앞에 당해왔던 그런 상황 었는데, 예수님 오시기 직전에는 로마의 또 지배를 또 받게 되죠.
이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우리가 이렇게 압제를 받지만 메시아가 강림하면 너네들은 다 그냥 초개같이 숯덩이가 되지만, 우리는 그 가운데 영광 중의 하늘로 승천하는 하늘로 휴거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이것을 간절하게 간절하게, 너무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이제 예수님 오셨어요. 예수님 오셔서 처음부터 예수님 메시아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이들이 함부로 판단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고, 일정 기간이 지났을 때, 그들이 확인하고 검증하고 점검한 상황 가운데 예루살렘 공회에서, 예수는 이단이다. 예수는 사이비, 거짓말, 사기꾼이다. 이렇게 선포를 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예수님에 대해서 대응하고, 또 부정하고 그렇게 했던 거거든요.
그런데, 그전에는 예루살렘 공회에서도 면밀하게 조사를 하고 있었고, 시대에 많은 민중들도 예수님을 많이 따르던 입장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그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들으면서 가장 소망했고 고대했던 것이 메시아가 강림하며 일어날 그 핵심 사항에 대해서 제일 관심이 많았던 거죠.
그 중에 하나가 대표적으로 우리는 다 하늘 앞에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하나님 믿지 않는 이들 우리를 괴롭혔던 이 모든 일들, 이들은 다 불에 타서 완전하게 심판을 받을 것이다라는 불심판에 대한 그 기대가 있었던 것이죠.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복음 12장 49절에 보면 "내가 이 땅에 불을 던지러 왔는데, 이 불이 이미 온 세상에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겠느냐?"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나는 이 땅에 불을 던지러 왔어. 그리고 이 불이 그냥 여기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다 붙었으면 내가 원할 게 없겠다. 내가 제일 원하고 소망하는 것은 이 온 세상에 불이 붙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기대와 부응하는 거죠. 그래서 그것을 보고 기대를 하고 기다렸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더라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가롯 유다 같은 사람도 가른 유다는 독립군과 같은 역할을 했던 사람이잖아요. 그 침략자 로마를 몰아내자 무력 투쟁에서 몰아내자 하던 열심당원이었단 말이에요. 근데 그가 볼 때는 예수님이라는 그 이분이 정말 구심점이 된다면 우리 민족이 강한 힘을 가지고, 응징력을 가지고, 로마에 대항할 수 있겠다라고 이제 예수님을 따랐던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의 그 행적을 가만히 보니까, 그 하늘의 권능과 능력을 가지고 로마를 갖다가 불바다 만들고, 그냥 앞재하는 그들을 갖다가 다 그냥 심판하고 이렇게 하셔야 되는데. 예수님은 그냥 오른뺨 때리면 왼뺨도 내주라, 왼뺨 때려? 그럼 오른뺨 내줘.
가롯 유다 같은 그런 어떤 열심당원 입장에서는
"한 대 맞았어? 저게 목을 쳐버려!"
이렇게 가도 시원치 않을 판에, 그런 모습을 보는 거예요.
유대인들도 가만히 보니까 뭐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는 거짓말을 했다. 예수는 사기쳤다. 이렇게 되는 거죠.
왜 불심판을 안했을까?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가만히 보니까, 예수님 분명히 메시아가 맞는데, 메시아가 맞는데. 왜 불심판 안 했지? 왜 불 심판 안 했을까?
유대인들은, "너가 불 심판 안 했으니까. 메시아가 아니다." 이렇게 또 된 거죠.
결국, 그들이 볼 때는 예수님은 불심판을 안 한 거예요. 실제로 불심판을 한 적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니가 거짓말했다 사기쳤다라고 정죄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데 이후에 기독교 교인들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은 분명히 메시아가 맞는데, 근데 왜 불 심판을 안 했지?'
그러니까, 유대인과 기독교의 차이는 예수는 메시아다. 메시아가 아니다. 이 차이가 다르고, 또 똑같은 것은 뭐냐하면, "불심판 안 했네? 불심판 안 했네?" 이건 똑같다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정말 불심판에 한다고 큰소리 쳐놓고, 그리고 구약의 이 많은 예언들을 성취하는 그 사명자로서 예수님 오셨는데, 이런 모든 예언들을 다 허사로 만들어버리신 건가? 어떻게 된 건가?
여기에 대해서 이제 우리가 생각을 안 할 수가 없게 된다는 거죠.
그러면, 예수님이 정말 메시아가 아니거나, 아니면, 혹시 예수님은 틀린 것이 없는데 우리가 잘못 오해한 것은 없는지. 이해를 잘못했거나 오해한 것은 없는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 성경은 성경을 통해서 풀어야 된다. 또 성경은 비유로 되어 있다. 성경은 예언과 성취의 상관관계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이것을 총 동원해서 성경을 자세히 보자는 거예요. 왜냐면 성경의 문제는 성경에 답이 있다고 했으니까.
불의 의미
예레미아 5장 14절에 보면 여기에 하신 말씀이, 하나님께서
"내 입에 있는 나의 말로 불이 되게 하고, 이 백성들을 나무가 되게 하여 이들을 불사르리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이 불이고, 또 이 백성을 나무가 되게 하고. 그래서 마치 불이 나무를 불태우듯이, 내 말로 백성들의 마음을 불 붙이겠다. 이렇게 나온 거죠.
또 예레미아서 23장 29절에 보면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하나님께서 말해요.
불같이 내 말이 뜨겁지. 당신의 말씀이 불같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신명기 33장 2절에는 불 같은 율법 말씀! 말씀을 불같다고 표현하고 있죠.
그 다음에는 이사야서 30장 27절에 보면,
"그 혀는 맹렬한 불 같다." 혀가 맹렬한 불 같다.
그리고 신약에도 야고보서 3장 6절에 보면 "혀는 곧 혀는 곧 불이요."
이렇게 혀는 곧 불이라는 거예요 혀가 뭡니까?
"너 혀 조심해! 너 혀 조심해. 혀를 함부로 놀리지 마."
그것은 뭐냐 하면
"너 아무 때나 가서 메롱 하지마라!"
이 뜻이 아니잖아요?
혀를 놀리지 말라. 혀를 조심하라. 그것은 말을 조심하라 이 뜻이잖아요. 다 아는 비유잖아요. 다 아는 표현법이잖아요. 그래서 앞서 이사야에서 구약에서 말한 것처럼 혀는 맹렬한 불같다. 혀가 곧 불같다.
그리고, 앞에 신약에서는 야고보서 3장 6절에
"혀는 곧 불이다. " 불의 세계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곧 "말씀이 불이다!" 이 말이죠. 혀는 곧 불이니까. 혀는 곧 말씀이니까.
그리고 마태복음 3장 11절에도 보면,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
이것은 뭐냐면, 세례를 줄 때는 말씀으로 세례를 주지, 막 불로 막 몸을 그슬리는게 아니잖아요. 이게 그냥 불로만 한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세례를 주는 거잖아요.
그래서, 성경의 많은 곳에서 보면, 말씀을 불로 비유하고 있더라는 거예요.
베드로후서 3장 7절에 "이제 하늘과 땅은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해서
간수 대신 바 되었다."
아니, 하늘이 어떻게 불에 타냐? 땅이 어떻게 불에 타냐?
하늘은 성경에서 보면, 하늘 땅 이렇게 비유 나올 때, 하늘은 보다 형이상학적인 세계, 보다 하늘의 세계, 보다 종교적인 세계.
땅은 보다 땅의 세계. 보다 형이하학적인 세계 보다 이방의 세계, 비종교의 세계.
그래서, 종교의 세계든, 비종교의 세계든, 모든 세계가 다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해서 간수되신 바 되었다.
그래서 뭘로? 동일한 말씀으로.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해서.
여기서도 말씀으로 불사른다고 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이야기한 것이 결국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해서 간수 되신 바가 되었다 말씀으로 불사른다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이 직접 또 이야기하시죠.
요한복음 12장 48절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예수님께서 내가 다시 온다면, 그때는 무엇으로 심판하느냐? 내가 한 동일한 그 말씀으로 결국 저들을 심판한다는 거죠.
이와 같이, 결국은 불은 말씀이라는 것을 성경상에서 많이 또 내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게 "불이 말씀이다."
이거 성경에 나와 있는 걸로 근거해서 이제 풀이법을 찾았잖아요. 근데 이렇게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맞는지를 확인을 또 해봐야 돼요. 그 확인은 뭐냐. 결국은 대입을 해봐야 되는 거죠. 그 역사적 사실에 역사적 현실에 대입을 해 봐야 되는 거죠.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을 쭉 하신 말씀 그 핵심은,
"내가 말씀으로 불사르겠다. 말씀으로 불사를 것이다."
구약의 이 모든 예언들은 다 말씀으로 불사른다는 뜻이야. 그러면 예수님의 그 삶에 대입을 해보는 거죠.
대입을 해 보니까, 아까 말한 누가복음 12장 49절은 "내가 이 땅에 불을 던지러 왔나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무엇을 원하리오."
그것은 내가 이 땅에 말씀을 전하러 왔는데, 내가 이 땅에 불 같은 말씀을 전하러 왔는데, 이 불 같은 말씀이 온 세상에 다 전해졌으면, 내가 무엇을 바라겠느냐? 나는 정말 이 온 세상의 말씀에 불이 전파되기를 바란다. 이 뜻이란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셨는지, 삶을 맞는지 확인해 보니까, 정말 예수님은 정말 단 한 순간이라도 오직 생명의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데 매진하셨고, 거기에 모든 것을 다 쏟아부으셨다는 거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틀린 말이 아니고,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모든 예언을 다 이루신 것이 맞고, 그리고 결국은 그 말씀은 불심판은 말씀의 심판이다. 이렇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가 생활 속에서도 마찬가지로, 모든 심판은 다 말씀을 한다는 거죠.
심판하면 생각나는 것이 축구심판, 배구심판, 운동 심판이 있죠. 이 운동 심판의 모든 심판들이 다 말로 심판하지, 불로 심판하는 경우는 절대 없죠.
"너 왜 저기 축구하는데 지금 네가 골키퍼도 아닌데 왜 손을 대? 그것도 결정적인 순간에 손을 대? 내가 보통 그냥 손을 댔으면 그냥 내가 좀 적당히 벌을 주려고 그랬는데 너는 결정적인 골이 들어간 순간에 손을 댔기 때문에 너는 엄청난 벌을 받아야 돼. 심판을 하리라." 하면서, 그냥" 불 가져와!" 해가지고
"너는 도대체 이게 이 상황에서 손을 댔다는 것은 이 손이 없어질 정도로 손을 없애버려야 돼!" 하고 그냥 천도짜리 불을 가지고 지지고, 막 이렇게 하는 건 아니죠.
말씀으로 말로 심판을 하는 거죠.
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법정의 심판이잖아요. 법정의 판사들이 심판할 때에,
"너는 이런 이런 나쁜 짓을 했으니까 천도의 불에 5분 동안 지지는 형을 처한다."
이렇게 하지 않죠. 말로 다 심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우리 생활 속에서도 이미 말로 다 심판하고 있는 거예요.
오늘날, 목사들이 또 신앙의 지도자들이 말씀을 전하면서 불 받아라 !하고 하지만, 사실은 불을 던지면서 "불 받아라!" 하는 게 아니잖아요. 불받아라 하면서
"오늘 불 많이 받으셨죠?"
"오늘 불 받을 겁니다.".
"불 받아라!" 하고 이렇게 했지만, 그러면서 불을 던지지 않잖아요.
근데, 그 말의 불을 받으면 정말 뜨거워져요. 몸이 뜨거워지고, 마음이 뜨거워지고, 막 열이 난단 말이죠.
이 불은 불이죠. 근데 불을 던지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면서 자기가 뭘 해요. 말로 하고 있잖아. 자기가 이미 몸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말씀이 불이라는 것은 자기 몸으로 자기 삶으로 지금 이 순간에 증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생각을 딴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완전 고정관념의 성경에 대한 풀이법 성경을 푸는 법에 대해서,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교육받다 보니까 자기가 그렇게 몸소 행하면서도, 자기 입으로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이 불이 불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그래서 행동 따로! 믿는 것 따로! 이렇게 되는 거죠.
그래서, 결국은 불은 말씀 아니냐.
그런데 이렇게 불받아라 하니까 왜 또 뜨거워질까?
영적으로 보니까 입에서 진짜 불이 나오더라는 거예요. 입에서 맹렬한 불 같은 불이 나오더라. 혀는 곧 불의 세계라. 명렬한 불의 세계라 하듯이 입에서 불이 나오는 거죠. 영적으로 그러니까 뜨거워지는 거죠.
그래서, 이 말씀 이 불로 심판한다는 것은 말씀으로 심판한다는 것이구나!
그래서, 다시 대입을 해보면, 예수님 때에 지구가 불바다 되고, 해와 달과 별이 떨어지고, 지구가 없어지고 새로운 새 하늘과 새. 땅이 생긴 것은 아니잖아요. 그때 당시 예수님 오셨어도, 외형적인 부분은 아무 변화가 없었다는 거죠. 그냥 동일한 그 땅이었고, 그 골목 그 집, 그 산, 그 들, 그 호수 그대로였다는 거죠. 변화된 게 하나도 없어요. 오직 말씀으로써 복음의 역사가 펼쳐져 나왔고, 불 같은 복음의 역사가 펼쳐져 나갔고.
그리고 베드로 같은 사람은 그가 갑자기 예수님 만나고 나서 새 하늘과 새 땅에 가서 산 것이 아니라, 새 집에 산 것이 아니라, 새 세계에 간 것이 아니라,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삶과, 또 만난 이후의 삶이 완전히 다른 삶이 되었다는 거죠.
그건 뭐냐하면은, 내가 교도소에 갔다 왔어요. 교도소에 나올 때 보면 그냥 새 사람이 되라고, 두부를 막 먹이잖아요. 그 두부를 아구작 먹으면서
"아빠 이제 내가 새 사람이 되었어요."
이렇게 하는데, 사실 새 사람이 된 게 아니라, 더 늙어서 나왔는데 또 초최해져서 나왔는데, 자기가 새 사람이라네. '이 미친 놈 아니야 ?'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것은 바로 자기의 삶이 변화되었다는 거죠. 생각이 변화되고. 그로 인해서 자기 삶이 변화되고. 이제는 내가 새롭게 살겠다는 뜻이잖아요.
베드로는 사실 그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에 삶이 새 하늘과 새 땅을 맞이한 그런 삶으로 전환이 되었다는 거죠. 자기가 새 사람이 되었거나, 진짜 새 집과 새 환경이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거죠. 결국은 말씀을 통해서 그렇게 베드로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되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가 있습니다.
말씀에 대한 비유들
그래서, 말씀에 대해서는 성경에도 많은 비유가 많이 나오는데, 말씀을 검! 말씀을 또 칼로 비유했고. 말씀을 낫으로 비유했고, 말씀을 기름으로 비유하고 말씀을 또 꿀로 비유하고, 말씀을 지팡이로, 말씀을 잘 박힌 못과 같다. 그래서 스승의 말씀을 잘 박힌 못과 같다. 무엇이 제대로 딱 박히면, 그냥 아주 견고하게 딱 박히듯이. 말씀이 내 뇌 속에 확실하게 내 사상 속에 박혔다. 그래서 못과 같다.
그리고., 말씀은 채찍과 같다. 채찍으로 맞으면 되게 따갑고 아프듯이 어떤 말씀의 책망을 정확하게 받았을 때는 내가 너무 마음이 아프면서 다시금 따끔한 교훈이 돼가지고 새롭게 삶을 살게 되는 그런 채찍이다 이렇게 표현하고.
말씀은 또 이슬과 같다.
그리고 말씀은 떡과 같다 말씀은 예수님께서 나는 생명의 떡이요.
"예수님께서 자기 보고 떡이래. 세상에 사람을 물로보나? 나를 물로 봐? 예수님 자기가 떡이래. 또 그 떡이 찹쌀떡 시루떡도 아니고 생명의 떡이래? 무슨 또 그런 떡이 있냐?"
나는 생명의 떡이라. 그 떡이 바로 말씀이라는 거죠.
그리고 말씀은 도끼와 같다. 이렇게 비유하고 있죠. 그래서 3년 만에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도끼를 찌고 불에 던지운다. 라는 것은 결국 도끼도 말씀이라는 거죠.
나무는 사람으로 비유하고 있고. 아까 나왔죠. 나무는 사람으로 비유하고 있는데, 사람으로써 귀한 가르침과 교훈을 받고서도, 일정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변화의 열매, 아름다운 삶의 열매, 행실의 열매를 맺지 못하면 말씀으로 심판해서 버린다 이런 뜻이죠.
말씀을 나팔로 비유했습니다. 우리 나팔로 비유하잖아요.
"야 너 나팔 조심해."
그거는 뭐 아무데서나 막 시끄럽게 막 그냥 트럼펫 불지 마라 그 뜻이 아니라 "말 조심해 나발 불지 마" 이렇게 하잖아요.
그 다음에 말씀을 도장으로 또 비유하고 있고요.
말씀을 포도주로 비유하고 있고.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아라. 이런 것도 보면 그냥 예수님도 포도주 많이 드시고 포도주 비유도 많이 하시잖아. 이게 아니라 결국은 여기서 이 포도주는 말씀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리고 또 말씀을 열쇠로도 비유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천국 열쇠를 주노니.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 것이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메일 것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줬다는 거예요.
그 또 천국 열쇠가 어디 갔을까? 분명히 줬으면 어딘가 보관되어 있지 않을까. 어딘가 있지 않을까? 그 천국 열쇠를 가지고 가면 하늘 천국문에 가서 키를 딱 꽂으면 그냥 이게 열리지 않을까? 그런 열쇠가 어딨어요? 그 열쇠는 바로 예수님께 들은 말씀이 바로 열쇠였다는 거죠.
"니가 열쇠를 받으면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듯이 이 열쇠와 같은 내가 전하는 생명의 말씀을 들으면 네가 천국에 들어감이 합당하다."라는 뜻으로 이야기를 한 거죠.
그래서, 말씀에 대해서는 다양하게 비유의 하나님께서 비유를 들어 쓰시고, 말씀의 속성을 통해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불로 비유한 이유
특히, 말세에 대해서는 메시아 강림이 가장 기독교 신학의 핵심이고 정체성이고 목적인데, 거기에 핵심적으로 들어가는 것이 불심판한다 거예요.
왜 하필 불일까? 떡심판, 아까 말한 검 심판. 낫 심판. 기름 심판. 도장심판한다. 이렇게 할 수도 있는데, 그중에서 왜 가장 대표적으로 불이라고 했을까?
하나님은 비유를 하실 때 속성으로 비유하시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모든 만물의 속성을 너무 잘 아시는 거죠. 그러니까 비유의 왕이시라는거죠.
그래서 이 불은 어떤 특징이냐?
소각과 창조
불과 말씀의 특징을 비교해 보니까, 불은 완전히 무엇이든지, 다 소각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소각하고나서는 새롭게 창조를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새 창조를 할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나는 완전히 그냥 녹슨 고철이야. 이제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이렇게 할 때도
"그래? 그러면 불에 집어 쳐넣자."
용광로에 집어 쳐넣으면, 다시 깨끗한 새 철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거죠. 새롭게 창조가 될 수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말씀은 어떤 속성이 있냐 하면은, 불이 이러한 것처럼 역시
"나는 이제 인생 끝났습니다. 나는 인생이 도저히 회복 불가입니다. 나는 인생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라고 할 때,
"그래? 말씀에 불에 집어 쳐넣자."
그러면은,
"그 수명을 다한 그리고 이제 막 막장까지 간 그 고철이 새로운 예쁜 새 빛나는 철이 되듯이, 결국 인생도 이와 같이 막장가는 인생이고. 이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이지만, 이거 말씀의 불안에 들어가서 완전히 새롭게 되면 새로운 사람 새로운 희망의 사람이 될 수 있어."라는 것으로 이야기할 수 있죠.
사람과 떨어질 수 없다
그 다음에, 또 이 불은 사람과는 절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거야. 사람과 절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다. 만약에 우리의 지금 21세기 삶 속에서 불이라는 요소를 빼버리면, 그냥 구석기 시대에, 원시수렵채취시대로 돌아가는 거예요.
우리가 쓰는 모든 물건 중에 불이 없이 만들어진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지금 펜도 불이 없으면 만들 수 없고, 천정도, 바닥도, 의자도, 그리고 옷도, 그리고 우리가 쓰는 마이크도, 모든 것이 불이 없으면, 아무것도 만들 수 없는 세계라는 거예요. 불이 없으면, 원시시대로 돌아간다 이런 거죠.
그래서, 말씀은 이와 같이 우리의 인생 가운데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그런 관계다.
그리고, 그 말씀이 없었을 때는 정말 지금 21세기 삶하고, 구석기 원시 시대의 삶과 비교가 안 되듯이, 그와 같이 우리의 삶은 완전하게 그냥 수준이 확 떨어지는 야만인과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말씀이 없으면, 이렇게 된다는 거죠.
그러면 누가 이야기하기를.
"아니, 저는 말씀이 없어도 너무 재미있게 잘 살았는데요? 세상에 문명의 이기를 즐기면서 너무 제일 잘 살았고, 행복하게 살았는데, 뭐 굳이 말씀 앞에 오는 게 더 재미없고 따분한 거 아닌가요?"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죠.
만약에 내가 구석기 시대 때 원시인이 되어가지고. 그냥 막 풀이나 따 먹고, 그냥 사자 잡아서 먹고, 이렇게 했더라면, 그냥 거기서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 수도 있었을 거예요. 그리고, 다른 집에는 돌도끼 하나밖에 없는데, 우리 집에 돌도끼 3개가 있다. 그러면 굉장히 행복하고 즐겁고 신나고 그냥. 그리고 나는 돌도끼 하나 없으면 평생에 돌도끼 하나 만들려고 막 애를 쓰면 살았을 거예요.
'돌도끼 하나만 있으면 좋겠다. 돌도끼 하나 있으면 좋겠다.'
이렇게 살면서 그 나름대로 거기서 행복함을 느껴요.
그런데, 만약에 21세기 삶을 체험한 내가, 다시 원시시대로 돌아가 가지고,
"나 너한테 돌도끼 5개 줄 테니까. 너가 아마 떵떵거리고 살 거야."
아마 이렇게 한다면 내가 여기 살 수 있겠냐는 거예요. 얼마나 불편해요? 얼마나 지옥 같을까요? 씻지도 못하죠. 입지도 못하죠. 자지도 못하죠. 먹지도 못하죠. 먹는 것도 정말 그냥 막 생식을 해야 되죠. 먹을 것도 제대로 없죠. 입을 게 있나요? 볼 게 있나요? 놀 게 있나요? 즐길 게 있나요? 씻을 수가 있나요?
이 세계를 경험한 사람은 그 세계에서 지옥 같아서 살 수가 없는 거예요. 구석기 시대처럼 한번 살아보라고.
요즘 가끔씩 tv에 "나는 자연인이다" 이렇게 하는데 그 자연인들조차도 구석기 시대의 삶을 사는 건 아니에요. 옷도 입고 있잖아요. 그리고, 뭐 그냥 다 그들은 모르지만 이미 그 삶 속에서는 정말 짐승같이 살지는 않는다고요. 사람처럼 살면서, 좀 문명의 이기를 조금씩 조금씩 좀 가려가면서 선택하면서, 산다는 거지. 그들이 진짜 원시 시대로 돌아가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원시대에 돌아가서 산다는 거는, 그들끼리는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몰라요. 그렇지만, 이 세계를 경험한 사람은 그 세계는 지옥 같은 삶이라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말씀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말씀 없이도 잘 살았는데, 무슨 소리 하십니까? 말씀이 무슨 인간과 떨어질래 떨어질 수 없는 관계고. 말씀 없으면 원시시대 같고. 무슨 소리 그렇게 하십니까?" 그러겠죠.
구석기 시대 사람은 돌도끼 두 개만 있어도 행복해 했으니까. 근데 이 시대를 경험한 사람 그 시대를 못 간단 말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한 사람은 말씀이 없는 삶을 살 수가 없다는 거예요. 말씀이 없이 그렇게 어떻게 어떻게 사나? 그 지옥 같은 삶을 어떻게 살아? 이렇게 한다는 거죠.
그것이 말씀이 불과 같은 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 중에 하나라는 것입니다.
열과 빛
그리고, 불은 열과 빛을 내죠. 말씀도 이와 같이. 어둠에서 두려움에서 걱정 근심에서, 또 밝고 희망차고 소망차고. 앞길을 훤히 보여주는 그런 세계를 우리 가운데 열어주죠. 그리고 따스함을 주고 이런 것들이 있죠.
그리고, 또 하나는 불은 공의롭죠. 불은 그냥 불이 확 화재가 났는데. 타다가
"야! 우리도 양심 있지. 이건 비싼 거야! 이건 태우지 말자!" 하고 쑥 돌아가고.
"야! 이건 싸니까 막 태워버려!"
이렇게 가리지 않는다는 거예요. 불이 나면 그냥 똑같이 공의롭게 다 버린다는 거죠.
말씀도 마찬가지로 사람 가려가면서, 그냥 말씀이 따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은 다 동일해. 마찬가지죠.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이나, 하나님과 먼 사람이나 똑같이 말씀은 똑같이 적용이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누구든지 간에 말씀을 알면. 그만큼 그 말씀의 혜택을 누릴 것이고, 그 말씀의 지혜와 권능을 받아서 또 멸망의 길을 피할 것이고. 말씀을 모르면, 아무리 그냥 하나님 사랑한다 하면서도, 몰라서 또 멸망의 길을 갈 수도 있다는 거죠. 그래서 이와 같이 말씀은 공의롭다. 하나님의 말씀은 공의롭다. 불이 모든 존재물에 대해서 공의롭게 태울 거 태우고. 못 태우는 거 못 태우고 동일하다는 거예요. 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도 그러하다. 그래서 말씀을 불로 비유를 하신 거죠.
성경을 보는 방법을 몰라 일어난 비극
그러면 또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죠. 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몰라봤을까? 그렇게 기다렸던 메시아인데, 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몰라봤을까? 그 이유는 결국 불이 말씀이라는 이 하나를 몰랐다는 거죠.
어떤 사람이 말씀을 듣고
"불이 말씀이네. 아 진짜 정확하네. 너무 속이 시원하고 후련합니다."
"진짜 말씀이어야죠. 진짜 그게 불이면 또 어떻게 해요? 정말 왜 그렇게까지 굳이 잔인하게 불러 막 태워서 그래. 사람을 죽이고 우리 얼마나 많이 그렇게 죽어가야 돼? 그렇게 하십니까? 불이 말씀입니다." 했더니만,
"아 너무 속이 시원한데요. 그런데, 불이 물이면 어떻고, 불이 구름이면 어떻고, 불이 불이면 어떻고, 그냥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거 똑같지 않나요?"라고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불이 말씀인 것은, 너무 좋고, 명쾌하고 좋은데, 그런데 불이 또 불이면 어떻고 불이 구름이면 어떻고,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는 거예요.
'나는 어차피 예수 믿고 천국 가면 되는건데?' 이렇게 이렇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불의 개념 하나가 중요하다는 것이죠.
유대인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렇게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을 그렇게 기다리면서 그렇게 애틋하게 사랑했어요. 온 지구촌에 그 소수 유대민족만이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고 섬기고 살았었어요.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은 선물과 같이 최고의 선물인 메시아를 보내주겠다고 약속을 하셨고, 그 메시아 강림을 기다렸고 그 극심한 외침속에서도, 그리고 핍박과 멸시 속에서도. 그 메시아의 그 소망 하나 때문에 그 어려움을 이기면서 지내왔던 거거든요.
그런데 정작 메시아가 왔을 때는 메시아를 몰라보고. 메시아를 오히려 죽여버리는 역사가 일어났고,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렇게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다렸는데, 메시아를 기다렸는데 정작 메시아를 맞이하지 못한 이유가 뭔가?
그것이 불이 말씀이라는 이 하나를 몰랐기때문에 이 한 자를 몰랐기 때문에 이 한 자를 풀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 메시아를 인정하지 않았던 거죠.
그래서, 아까 나왔듯이 구약의 이런 어떤 심판에 대한 강렬한 소망, 우리가 지금은 짓밟히고 너무너무 괴롭고 힘들지만,
"언젠가 희망과 소망의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시는 날, 니네들은 진짜 숯덩이처럼 다 타서 없어질 것이고, 우리는 영광 속에 하나님과 함께 하늘나라에 거하게 될 것이다."
이 소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님 오셔서
"내가 메시아다. 하면서 내가 이 땅에 불을 던지러 왔다!" 했고, 그 희망과 소망을 가지고 가만히 확인해 보니까, 전혀 그런 일이 없더라. 그래서 메시아가 아니다라고. 그런데 메시아가 아닌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하나님을 갖다가 민망게 하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로서 저를 그대로 놔둘 수는 없다." 하고 목숨 걸고 죽인 거잖아요
결국은, 뭐냐 하면 그들은 불이 말씀이 어떻고, 이 구름이 어떻고, 불이 불이면 어때요? 그냥 하나님 믿고 천국 가면 되고. 하나님 믿고 메시아 만나면 되죠.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 한 자를 몰랐기 때문에 메시아를 몰라봤다는 거죠. 그래서, 오늘날 이 시대도 마찬가지로, 정말 말씀을 정확하게 알아야, 오실 메시아를 알 수 있다. 확인할 수 있다 만날 수 있다. 이런 거거든요.
진짜 불로 심판하지 않은 이유
그러다 보니까, 이 말씀을 받으신 총회장목사님(통칭:선생님)께서 기도하시면서 물어보셨어요.
"아 그러면 예수님! 정말 2000년 전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몰라볼 때 너무 안타깝고 너무 가슴 아프고 , 너무나 너무나 심각하니까. 예수님 그냥 뭐 불이 말씀이었다 할지라도 까짓거 그냥 불바다를 한 만들어버리죠 그냥. 그러면 예수님 믿었을 거 아닙니까? 아니 그게 불이 불이 아니라 불이 말씀이라 한다 할지라도, 유대인들이 저렇게 무지해서 예수님 몰라보잖아요? 그럼 저들이 그냥 예수님을 알아보게끔 불러 한번 싸질러 버리면 어땠을까요?" 라고 물어보셨어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성경 마태복음에 부자 청년 비유가 있어요. 한 부자 유대 청년이 젊은 청년 실업가죠. 예수님을 찾아온 거예요.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찾아온 거죠. 만약에 본인 자기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따른다는 것이 알려지면, 사업상에 큰 불이익이 있고, 유대 사회에서 자기는 완전히 그냥 제외될 수도 있고, 자기의 목숨을 건, 하나의 그런 믿음이고 확신이었죠. 그렇게 믿음이 있는 자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야기합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
라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너는 십계명을 지켜라."
하니까, 자기가 메시아라고 생각하는 예수님 앞에
"저 십계명 지켰는데요!" 라고 이야기해요.
그건 상당히그냥 믿음이 또 그리고 행함이 수준에 올랐던 사람이죠. 그냥 뭐, 보통 사람한테 한 게 아니라, 메시아로 믿는 존재 앞에 나는 십계명을 지켰습니다. 이렇게 한다는 거는 굉장한 행동 기준을 가진 사람이고, 도덕 기준을 가진 사람이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래 그럼 뭐 간단하네. 너는 그냥 너의 모든 소유를 팔고, 그냥 나를 쫓아와. 그러면 돼."
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러면은 유대 청년의 대답은
"진짜 예수님 그것만 하면 됩니까? 그거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게 다예요? 저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야 앞뒤의 맥락상 정상인데, 그러지 않고 이 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가더라 하고 이야기가 끝나버려요. 그게 뭐냐면, 이 사람 뭐 그렇게 했겠어요? 안했다는 뜻이죠. 그러니까 이 부자 유대 청년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했단 말이에요.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예수님의 길을 따르지 못하고, 영생의 길을 따르지 못하더라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진짜 막 구름 타고 나타나고, 진짜 불을 막 던지고 심판하면 사람들 진짜 예수이다 메시아다! 메시아다! 예수가 메시아다 이렇게 했겠죠. 그렇지만 결국은 자기 삶이 변화되지 않고서는, 예수님과 같은 그 삶을 따라가지 못하고, 동행하지 못하는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거죠. 부자 유대 청년처럼.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바뀌어야 된다 사람이 바뀌어야지. 자기가 그 바뀐 만큼, 거기에 해당되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냥 내가 진짜 불가지고 심판을 한다면, "오, 예수가 메시아가 맞구나!" 하기는 하겠지. 그렇지만, 결국은 자기의 삶이 변화돼야 되는데, 유대 청년은 결국 믿는다고 했으나 삶이 변화되지 않았지 않느냐? 이것이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라고 이야기하셨어요.
그래서 결국은 말씀을 전할 수밖에 없다. 말씀을 전해야 사람이 변화되고, 그 변화되어야 자기 구원을 이룰 수 있다 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의 온전한 불심판은 바로 말씀 심판이다. 그래서 이 시대에도 바로 말씀으로 심판을 하신다.
말씀(진리)이 중요한 이유
그리고 메시아가 왔을 때, 그 메시아가 메시아인 증거가 도대체 뭐냐?
"내가 메시아요." 하는데, 메시아의 어떤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메시아 신분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메시아라고해서 뭘로 증명할 수 있느냐? 했을 때 결국은 말씀이 마패가 된다는 거죠. 말씀이 신분증이 되고 말씀이 그의 메시아인 것이 증거가 된다는 거죠.
그래서, 구약에 아무도 풀지 못했던 그 말씀들을 그가 오면 그 말씀을 싹 다 풀어주는데, 그 말씀을 들을수록 사람이 명쾌해지고, 모든 문제가 다 풀어지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지니라" 우리의 고민과 걱정 근심 염려 성경에 대한 의문 이 모든 것이 풀어질 때에, 그것을 통해서 그가 메시아인 것을 증명하는 증거가 되는 것이 바로 또한 말씀인거다라는 거죠.
그래서, 결국 이 시대에도, 다시 메시아가 올 때는 말씀으로 심판하신다. 말씀으로 심판한다는 것은 어떤거냐 하면은 그냥 잘한 자에게는 잘했다고 하면서 더 잘할 수 있도록 길을 일러줄 것이고, 또 못한 자에게는 네가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지 말아라. 이렇게 해야한다 돌이켜야 된다라고 계속해서 가르쳐주는 거죠. 선한 자에게는 선한 대로 악한 자에게는 악한 대로다.
심판이 더디게 느껴지는 이유
그래서, 베드로후서 3장 8절에 보면 어떤 이에게는 심판이 더디게 느껴진다는 거예요.
"왜 이렇게 하나님이 심판을 안 하십니까? 세상을 좀 보십시오. 세상 개판 아닙니까? 이런데 이 악인들 심판하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어떤 근거를 가지고 없다고 하냐면,
"하나님이 계시면 세상이 이 모양이 이 꼴이겠냐? 하나님이 계시다면 세상이 이럴 수가 없지. 그러니까 하나님이 없는 거지.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렇게 악인들이 득세를 하고 선한 자들이 짓밟히고, 고통받고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라고 이야기를 하겠죠.
근데, 하나님은 그런 많은 소리를 듣는다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가 천 년 같이, 천 년이 하루같이 이 한 가지를 잊지말라. 하나님이 그래도 기다리고 기다린다는 거예요. 오래 참으신다는 거죠. 왜 이렇게 오래 참으실까? 아무도 멸망치 않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오래오래 참으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랑의 하나님이죠. 예수 안 믿었다고 해서, 불에 꼬실러 죽여버리고, 그냥 선인이라고 해도 너 불에 타 죽으라! 그러지 않죠.
그 예전에, 오늘날 이 시대도 마찬가지, 특히나 옛날에는 우리나라 230년 전에는 예수를 믿고 싶어도 믿을 사람이 누가 있어요? 아무도 모르죠. 예수를 믿을래야 믿을 수 없는 거예요.
임진왜란 때도 보면, 이순신 장군이 예수를 알았겠어요? 근데 일본군은 종군신부를 데리고 왔어요. 그때 이미 네덜란드를 통해서, 일본은 기독교가 전래되어 있던 시절이었거든요. 그래서 종군신부가 따라와요. 우리 일본군이 조선 땅을 이기게 해달라고.
그런데 그 이순신 장군이 땅을 뺏기고 바다에 떠 있는 거예요. 근데 우리 조선땅 통영 저기 진지를 바라보면서, 부산포 진지를 바라보면서 대포를 한 포를 쏘려고 하는데
"어디가 대장 막사냐?" 하니까,
"저기, 저기 있잖아요. 십자. 빨간 십자 표시가 있죠? 저희가 대장 막사예요."
"저 십자 표시는 뭐냐?"
"서양 귀신 야수, 서양 계신 야수를 섬기는 신부가 있는 곳입니다. 항상 저 신부는 대장 옆에 같이 있습니다."
"그래? 그럼 저기를 향해 쏘아라."
우리 이순신 장군이 그 하나님의 대신자인 십자가를 상징하는 그 신부 막사를 향해서 대포를 쏘는 거예요. 사실은 일본 놈이 더 나쁜 놈이잖아요? 그렇지만은 이순신 장군은 거기에 대포를 쏘는 거예요. 그 하나님의 전을 향해서.
이런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어요?
근데 "예수 안 믿어? 너. 지옥 가!"
예수님이 누군지 알 게 뭐예요. 이순신장군이 예수가 누구인지 알 게 뭐예요.
백제 시대 때 심청이 같은 자가 있었는데. 예수 몰라요. 근데, 안믿으니깐 지옥 가! 이 시대도 그냥 있으면 예수님 모를 수 있는 사람도 있겠죠.
그들에게 "너희 예수님 안믿으면 지옥가!" 이렇게 할 수는 없다는 거죠.
지구종말과 불심판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시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이 세상을 완전히 불로 싸질러버리고, 지구 종말을 가져올 것입니다."라고 많은 예언가들도 예언하고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도, 다방면에 자기 분야에서 다 지구 종말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왜 지구 종말이 올까요? 곧 예수님이 강림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것은 이미 성경에도 다 나와 있잖아요.
그래서, 많은 예언자들도 이렇게 나름대로 자기 수준에서 자기 차원대로 예언을 하고 있는데, 모든 게 다 일치하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오시면, 지구는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를 안 믿는 자들, 다 멸망에 갈 것입니다. 자 기도합시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이렇게 하는데, 무슨 이게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야? 도대체 그게 왜 사랑이 많아? 정말 사랑이 많다면.
"그래도 나를 좀 욕을 해도 내가 그래도 봐줄게. 그래 뭐, 그냥 하룻 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알겠냐?"
이렇게 하면서, 그냥 다 용서해 줄 것 같은데, 하나님은 정말 밴댕이 속알딱지만한 그 어떤 심보를 가지고.
"나 안 믿었어? 못 믿었어? 이루와! 불에 확 그냥 태워 죽여버릴래."
이런 하나님이여야 되느냐는 거죠. 이게 무슨 사랑의 하나님이야? 아니라는 거죠.
하나님은 정말 사랑의 하나님이세요. 예수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웃고 저주하고 자신을 죽이는 그 순간에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셨죠. 저들을 변호할 꺼리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마지막 변호할 그 변호의 명분이 하나도 없는 상황,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요거 하나는 정말 그래도 좀 참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요거 하나 좀 참작해 주세요." 이것을 찾아내는 사람이 변호사의 역량이고, 변호사의 역할이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런 상황 가운데 저들이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절대 절명의 그 완벽한 죄악 속에서 그래도 거기서 하나를 찾아내는 거예요.
"하나님 저들이 몰라서 그렇습니다. 알았으면 했겠습니까? 저들이 행한 모든 죄. 다 할 말이 없습니다. 분명히 잘못했습니다. 어떤 변호의 변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저들이 몰라서 그러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참작해주세요." 라고 했던 분이 예수님이에요. 그 예수님을 보내시고, 예수님의 그 모든 것을 또 주관하신 분이 하나님이세요. 그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냐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이 성경을 잘 못 푸니까, 문자 그대로 푸니까, 하나님이 잘 이해가 안 되고, 하나님의 그 어떤 근본 속성조차도 우리가 오해를 하게 되는 그런 상황들이 자꾸 생기게 되더라는 거죠.
그래서, 불심판은 말씀심판이다. 그래서, 이 시대도 마찬가지, 예수님 하신 말씀처럼 이제 하늘과 땅은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하기 위해서 간수하신바가 되었다. 그리고 내가 마지막 날에 저들을 또 심판할 것이니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요한복음 12장 48절 그리고 베드로후서 3장 7절 말씀 그리고 누가복음 12장 49절의 말씀. 이 모든 말씀들이 다 불은 말씀이다라고 하는 순간에 싹 다 풀어지더라는 거예요.
그 예수님의 삶은 내가 이 땅에 말씀 전하러 왔는데, 이 말씀이 다 전해졌는데 뭘 원하겠느냐? 그 말씀대로 그대로 실제로 행하셨고. 또 그로 인해서 불이 말씀이라는게 증명이 되고 있잖아요.
그래서 이 시대도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메시아가 다시 강림할 때 그때는, 그냥 이 세상에 지구가 박살나고, 막 그냥 끝나고 하는 이런 세상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더 차원 높은 말씀을 전하시는 거죠.
예수님께서 모세의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모세 율법을 온전케 하러 왔다 했던 것처럼, 이 신약 말씀은 2천 전에 예수님도 내가 더 말하고 싶지만, 이 시대가 감당치 못하고, 이 시대가 이해하지 못하니까 내가 다 말할 수 없다라고 하셨던 그 말씀을 이 시대에는 때가 되어서 또 말씀을 전하십니다.
우리가 학문을 가르칠 때도, 초등학교 때 1학년 때는
"1다음에는 2구요. 2다음에 3이고요. 3다음에 4고요. 제일 작은 숫자는 1이에요."라고 했다가, 선생님이 속으로 사실 입이 간지간질하죠.
"1하고 2사이에는 숫자가 없어요." 하지만 속으로는,
"사실은 숫자가 더 있는데, 정수가 있고, 소수가 있고, 무리수가 있고, 유리수가 있는 데, 내가 입이 간질간질하지만, 니네들이 이해하지 못하니까, 일단 난 말 못해. 그런데, 나중에 때가 되면, 지금 내가 못 다한 이야기를 너희들이 듣게 될 거야. 내가 나중에 지금 너희들이 1학년인데, 내가 나중에 너희들 6학년 될 때, 내가 6학년 선생님으로 와서, 내 그때는 내가 소수에 대해서 이야기해주고, 분수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줄게. 근데 지금은 내가 말 못해."
이렇게 그때가 이르지 못해서 하지 못했던 말씀들,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했으나, 시대가 준비되지 못해서, 아직 어려서 못했던 말씀들을, 또 이 시대에 와서 더 뜨거운 말씀으로, 더 불같은, 더 뜨거운 맹렬한 말씀으로 전해준다는 거죠.
그래서,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심령이 변화되고, 변화된만큼, 우리가 주가 인도하신 그 길을 따라가고, 그로 인해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다. 그리고 무서움과 두려움과 공포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죠.
"그러니까 아담 때 그렇게 아담 타락해서, 그때 막 지구 없애버리지 그냥. 예수님 그렇게 십자가에 처절하게 죽음 당할 때, 그냥 지구를 박살 내버리지 뭘 그냥. 그때는 가만히 있다 지금 와서 왜 지구를 박살 낸다고 하십니까?"
하지만 예수님 때에 그러한 것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말씀심판했던 것처럼, 지금도 앞으로 동일하게 말씀심판의 역사가 일어난다 하는 것이죠.
근데, 이것을 모르면, 그걸 곧이 곧대로, 문자 그대로 믿는다는 거죠.
저도 사실은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 불의 개념을 들었을 때, 너무 속이 후련한 거예요. 너무나 당연하고.
항상 말씀들을 때마다 늘 마음에 걸려 있었던 불. 불심판에 걸려 있었고.
'무슨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 그렇게 하셔? 그럼 나는 그냥 하늘로 올라가고, 구원받는다고? 우리 엄마는 그냥 교회 안 다녔다는 이유로 나보다 훨씬 더 착한데 불에 꼬실려 타 죽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구원받았다고 하늘을 올라갈 것이냐? 만약 그렇다면 내가 예수 오지 말라고 해야 될 거 아니냐? 예수님 오지 마세요. 왜 오세요? 오지 마세요. 오시면 또 우리 엄마 불에 태워서 죽일 거잖아요. 오지 마세요. 제발. 왜 오시는 거예요? 안 오시면 안 돼요? 오지 마요. 그렇게 하는 게 더 낫잖아요. 왜 와가지고 완전히 이 세상을 생지옥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예수 안 믿었으니까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 친구들이고 뭐고, 그냥 이모고, 고모고 막 그냥 예수 안 믿는 사람 다 불에 타서 내 눈 앞에서 그냥 지글지글 타서 그냥 재가 되는 것이 그렇게 보고 싶겠냐는 거예요. 그럼 예수님 오지 말라 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꾸 의문이 있는데, 꼭 말씀 전하고 나서 기도할 때는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그런데, 무슨 은혜가 풍성하냐는 거예요. 제발 안 왔으면 좋겠고. 차라리 없으면 좋겠다. 하나님이 왜 있는 거야? 없으면 안 돼? 왜 있어가지고 사람들한테 왜 이렇게 하는 거야.
그리고 나 또한 예수 믿는다 하지만 제대로 안 믿고 있기 때문에. 메시아가 와가지고
"너 솔직히 제대로 안 믿잖아. 할 말 없지?" 불에 타서 죽을 것 같기도 하고요.
불은 말씀이고. 성경에 불은 말씀이다! 나와 있잖아요. 그리고 불이 말씀이니까 너무 당연하고. 아 그랬구나! 그랬구나! 모든 것이 한 번에 싹 풀어지는 거예요. 너무 간단하게.
그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할지니. 이 말이 진짜 맞구나! 그래서 말씀!
하나님은 선한 자에게 악한 자에게 어떤 누구에게도 말씀으로 역사하시는구나!
예수님의 삶을 보면 너무 정확히 알 수 있죠. 예수님께서 그냥 유대인들한테 불을 던져가지고, 유대인들을 다 불에 태워 죽인 것도 아니고. 로마 사람들에게 불을 던져가지고 이스라엘을 갖다 독립시켜 해방시켜준 것도 아니고. 어디에서 누구를 불러 불로 심판했습니까? 오직 말씀 전하시고. 말씀 전하시고. 말씀 전하셨는데..
말이면. 똑같은 말이 아니라. 구약 시대 그 누구도 풀지 못했던 비밀의 말씀. 인봉의 말씀을 풀어주었고, 그 말씀을 통해서, 한낮 고기잡이에 불과했던 어부에 불과했던 그 베드로가 시대의 사도가 되고, 또 이런 역사에 일으켰던 것처럼 우리의 삶 속에서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 오직 말씀이 우리의 모든 심령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등불이 되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된다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왔을 때, 유대인들은 다 알아보게오는 걸 생각한 거예요. 그냥 와서 불로 막 세상을 심판해대끼니까, 갑자기 로마 전체가 불바다가 되는 거예요.
"도대체 이 불바다를 만든 사람 누구냐 도대체? 이거는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데?" 하고 딱 보니까 어떤 예수라는 청년이 손에서 막 불이 나오고, 막 그냥 불아! 번져라 하니까 입에서 불이 날아가고 그냥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고 그 불을 주관하고 있는 거예요.
"어! 저분이 메시아구나!" 이렇게 할 수 있겠죠.
근데, 불이 말씀이란 말이에요. 불이 말씀이니까, 메시아를 도대체 알아볼 수 있는 근거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를 대입해 보면 알잖아요. 베드로는 예수님 메시아인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영생의 말씀이 여기 있사오매 내가 뉘게로 가오니까? 영생의 말씀을 들으니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결국은 베드로는 말씀을 듣고서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알았다는 거죠.
이 시대에 다시 오실 메시아도 재림도, 역시 마찬가지로 오직 말씀으로만이 메시아인 것을 분별할 수 있다. 그래서 말씀을 귀담아 들어봐야 된다
만약에 2000년 전에 예수님 때에, 어떤 메시아를 기다렸던 어떤 유대인이 예수님을 판단할 때, 그냥 시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대로, 그 시대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대로, 또 그 시대 모든 대중들이 그렇게 하는 대로만 따라갔더라면, 절대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겠죠 .
이 시대도 마찬가지로 어떤 예수님의 외모를 보거나 예수님의 어떤 가문을 보거나, 예수님의 어떤 스펙을 보거나, 예수님의 어떤 나이와 연륜을 보거나 해서는 하나도 메시아 같은 부분이 없다고 판단됐을 거예요.
그러나, 이 시대 마찬가지로 우리가 시대에 하나님의 사명자가 왔을 때, 예수님의 메시아에 강림이 임했을 때는 무엇을 알아볼 수 있느냐? 오직 말씀이 아니고서는 알아볼 수 있는 근거가 하나도 없다. 그래서 우리도 마찬가지로 영생의 말씀이 여기 있사오매 이곳이 하나님의 역사인 것이 맞습니다. 영생의 말씀이 여기 있으니 당신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맞습니다라고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말씀이 너무 중요하다. 말씀이 생명을 살리고, 말씀이 근본 메시아를 온전히 알게 하는 뜻이 된다. 근데 흑암 마귀 사탄은 이와 같이 그 말씀을 절대 못 듣게. 그 말씀을 절대 못 알아듣게. 그래서 그 고정관념으로 완전히 철철철철 우리를 묶어놨다는 것입니다. 2000년 동안 그 무지 무지를 우리 가운데.
그래서 베드로서 3장 17절에도 말하기를 성경을 보다 보면 다소 어려운 것도 있다 그런데 굳세지 못한 자들이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이렇게 되는 거죠. 그래서 정말 예수를 안 믿는 것보다도 잘못 믿는 것이 더 무섭다.
안 믿는 것보다도 잘못 믿는 것이 더 문제라는 거죠. 하나님을 안 믿는 것보다 하나님을 잘못 믿는 것이 유대인에게는 더 문제가 되었던 것이죠. 그래서 정말 하나님을 안 믿었더라면, 예수님을 그렇게 죽이기까지는 하지 않았겠죠. 유대인들이 불교인이라면 예수님을 그렇게 죽였겠습니까? "저 젊은 청년이 그냥 정신이 돌았구만. 미쳤네 불쌍하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자." 그랬겠죠. 근데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들이었던 거예요.
그런데, 잘못 믿었던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우리의 하나님을 거룩한 하나님이 욕되게 하는 저 예수를 살려둘 수 없다. 목숨 걸고, 저를 죽여야 되겠다!" 해서 그 가지 말아야 될 길을 간 거잖아요.
그래서 아는 것이 중요하다. 진리가 중요하다. 말씀이 중요하다. 그래서 오직 불은 말씀의 심판이다. 불이 말씀 심판이면, 땅은 그대로 있겠죠. 땅은 영원히 있겠죠.
예수님 때도 예수님이 오시고 난 전후에, 그 땅 그대로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다시 이 땅에 메시아의 강림이 임해도 이 땅은 영원히 그대로 있다. 그래서 전도서 1장 4절에 그 말씀이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하는 것이 맞고, 45년 동안 간절하게 정성들여 만든 이 땅이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도 맞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불의 개념을 통해서 불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다. 이것을 정확하게 알아야 된다.
이 불! 한 자를 몰라서. 기다리던 메시아를 죽이는 그런 비극이 일어났다. 그래서 우리도 이와 같이 이 불이 말씀인 것을 확실하게 알자.
이 시대에 이 기독교가 존재하는 목적 그 정체성이 메시아의 강림을 기다리는 거잖아요. 메시아 강림을 제대로 맞이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메시아 강림을 제대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이 불이 말씀!이 하나를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된다.
"불이 말씀이면 어떻고. 불이 불이 불이면 어떻습니까? 예수 믿고 천국 하면 되지."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걸 몰라서, 예수님을 오셔도 맞이하지 못하고, 예수님의 뜻대로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한다는거죠. 그래서 알아야 된다. 불이 말씀이다. 확실하게 알아야겠습니다.
성경 2천 번 읽은 정명석목사님께 배운 말씀입니다. 성경은 전설이나 신화도 아닌 하나님의 유일한 진리말씀인데 모르니 억지로 성경을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은 보편타당한 진리이며 성경의 문제는 성경에 답이 있습니다. 이 채널을 통해 성경의 가치를 더 깨닫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지니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와 이 시대에 우리 신앙인이 할 일이 무엇인지를 나누고자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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